[설악산]..27년만에 쓰는 산행기1

성석제님의 소설집 '지금 행복해'를 읽기 시작했다.
아직 1/3정도만 봤으니 한 참을 더 읽어야겠지만
제일 첫 부분에 '여행'이란 제목의 글에서 26년도 훌쩍 넘은 나의 첫 여행이 생각났다.
책속의 내용은 고등학교의 세 친구가 대학 여름방학을 이용, 무전여행을 하는 것이었다.
같이 여행을 하면서 개인성향에서 오는 갈등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다.


난, 83년 여름 난생 처음으로 '설악산'에 가 봤다.
집을 제외하고 멀리 여행-여행이라 할 수 없는 할머님댁 방문- 간 것이라곤 충주 큰집이 다였기에
강원도, 그것도 푸른바다가 있는 동해쪽의 여행계획에 방학이 되기만 손꼽아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그시절만 해도 여자친구들끼리 며칠씩 묵는 여행은 감히 허락받을 생각조차 못할 시절이었기에,
친구언니가 다니는 ○○은행의 직원용 여름캠프숙소를 얻어서 친구 언니(보호자격으로)와 우리친구들이 같이 가게 되었기에 허락을 받을 수 있었을게다.

은행에서 내 준 버스에 몸을 싣고 동해를 향해 떠나는 마음은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설레였던지...
그때도 사람이 득실대는 해수욕장보다 산을 더 좋았었나보다.
친구언니와 또 한명의 친구는 설악해수욕장으로 갔고, 나와 친구는 설악산을 향했으니까...
땀을 뻘뻘흘리며 권금성에 올랐을 때..밑에서 본 설악과는 또 다른 모습에 푹 빠져서
더 높이, 높이 오르기를 갈망했던 것 같다.
힘들어 축 늘어진 친구를 흔들바위 부분 계곡에 두고, 혼자 울산바위에 올랐던 것을 보면 말이다.
힘들게 오른만큼, 울산바위에서 본 설악은 내가 지금까지 본 설악중 최고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내려오면서 어찌해야 대청봉에 갈 수 있을까를 고심했던 기억.
왜냐하면, 전혀 등산계획은 전혀 없이 바다에서 혹은 내설악 조금 구경하려던 계획이었기에
등산장비는 커녕 등산화도 없이 운동화에 면바지와 청바지가 전부였기때문이다.  

다음날 새벽 2시, 친구를 깨웠다.

- ○미야, 대청봉에 가자.
그런 내게 미쳤다며, 대청봉에 다녀오려면 적어도 12시간은 족히 걸린다고 말린다.

- 어제 옆방 사람들(언니랑 같은 은행직원 두 커플-등산장비도 제대로 갖춘 이십대 중반)을
  울산바위에서 만났는데  오늘  대청봉 갔다 올거라며 같이 합류해도 된다했어. 그러니 같이 가자.

그런데 그녀는 힘들다면서 바다에 가서 놀거라고 나 혼다 다녀오란다. 나삔 지지배...
이런 기회 아니면 언제 또 대청봉을 밟아볼까 싶어 나 혼자라도 다녀와야지 하고 긴산행을 위해 채비를 서둘렀다.
근데 산행계획이 없었던 터라, 준비랄 것도 없었다.
그네들보다 한참 어린 나이덕에 내 몸만 무사히 다녀오면 되었기에..^^

딱 붙는 면바지(지금 유행인 스키니진처럼 딱 붙은 바지가 유행이었다.)는 활동하기 어렵다는 말에
가위를 빌려서 숭덩숭덩 무릅위 길이로 짤라 반바지로 만들고,
콘도에서 빌린 군용렌턴, 여벌 셔츠와 수건 한장과 물병 하나, 그리고 삶은 옥수수가 내 준비물의 전부였다.

새벽 3시가 되어 나가니 옆방 사람들이 등에 한짐되는 배낭을 짊어 매고 나온다.
'도대체 뭘 저리도 많이 가지고 다닐까?' 하는 생각은 지금 산에 다니면서도 의문이다.
당일치기 12시간 내외로 다녀올 등산인데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나와 산의 첫 인연이 시작되었다.
천불동 계곡 산행코스인 비선대로 오르는 길은 깜깜해서 하산길에서야 그 모습을 볼 수 있었기에
많이 지루했다.
비선대에 올라 잠시 쉬면서 그 일행 중 한 여자가 내게 말했다.

- 산을 아주 잘 타게 생겼어요. 걸음보면 알아요. 보폭이 일정한 것이...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그녀의 말에 혹해서 지금껏 산을 오르는지도 모르겠다. ㅎㅎ

비선대에서 잠시 쉬면서 매점에서 빵과 우유를 사서 가방에 넣었다.
새우깡도 하나 사고...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무모한 행동이었던가? 대청봉을 동네 뒷산취급을 했으니말이다.
산이라고는 우리집 뒷산인 '백련산'과 그보다 조금 더 높은 '인왕산'만 보며 자랐으니
1700미터가 넘는 설악산이 얼마나 큰지 가늠조차 하지 못했나보다.
막연하게 무지 높고, 오늘 해지기 전에는 내려와야 한다는 것밖에 모르니
꾀를 피울 수도 없이 열심히 걸었던 기억뿐이었다.

한참을 오르니 등산객이 하나 둘씩 눈에 띄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행들이 멈추더니 아침을 해 먹고 간다고 배낭을 내려놓는다.
그리곤 쌀과 부식거리 코펠, 딥따 무거운 알콜버너를 꺼내는 것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세상에! 저렇게 무거운 걸 짊어지고 다닌단 말야? 고행일세...저걸 언제 해서 먹고 가?'...하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 졌다.

난생처음 하는 산행이라 많이, 빨리 걸어서 다리가 뻐근하긴 했지만 아직까진 괜찮았고,
갈수록 몸도 가벼운 것 같아 지금 더 가고 싶었던 마음에서.
더구나 난 아침대용으로(그당신 난 아침은 엄마의 성화에 먹었지 그다지 즐겨 먹진 않았었다.) 빵과 우유까지 준비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옆에 뻘쭘하게 있는게 영 못마땅한 거였다.
날도 훤하게 밝았겠다, 산행하는 사람들도 종종 보이니 길은 물어가면 대청에 오를 수 있겠다 싶었다.

- 저....저 먼저 출발할께요.
조심스레 말을 꺼내니 그 일행중 내게 친절하게 했던 여자분이 펄쩍뛴다.
나이 어린 학생을 끝(숙소)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괜찮다고, 걱정말라고 하고는 일어서서 냅다 대청을 향해 출발했다.

설악산은 유난히 많은 바위로 된 산이기에
산행하기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지만 하필 고른 코스가,
아니 쉽다고 고른 코스도 그렇게 힘들 줄 알았더라면 그런 호기를 부리지 않았으리라..
더불어 가도 힘들 초행길을, 나홀로 가자니 배나 힘들었던 기억에 지금 다시 다녀오라면 손사래를 칠 것이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그렇게나 힘들면서도 배가 고프지 않는 것이다.
배가 고파오기 전에 먹을 것을 채워줘야 그 열량으로 산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턱이 없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걷고, 또 걷고....
뱃속에서 신호가 올 때쯤의 정확한 시간은 모르지만 벌써 점심무렵이 가까웠을 때였나보다.


- 계속 -